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밀라 파커 보울스 (문단 편집) === [[콘월 공작|콘월 공작부인]]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카밀라_리츠칼튼.jpg|width=100%]]}}} || || '''1999년, [[런던|{{{#000 런던}}}]] 리츠칼튼 호텔에서 [[찰스 3세|{{{#000 찰스}}}]]와 함께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카밀라.''' || 각종 스캔들로 망신살을 뻗친 카밀라는 찰스와 재혼하기 위한 계획을 본격적으로 세우기 시작했다. 1995년 카밀라는 유명 홍보 전문가인 마크 블랜드를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로 고용했으며, 이후 마크 블랜드는 1996년부터 2002년까지 찰스의 부비서관 직을 맡았다. 홍보 전문가였던 블랜드는 [[다이애나 스펜서]]와의 이혼으로 추락했던 찰스의 대중적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큰 역할을 했는데, 20%까지 떨어졌던 지지도가 블랜드의 재임 기간동안 '''무려 75%까지 상승'''했다. 덕분에 찰스는 항간에서 돌았던 왕세자 교체설을 무력화시키고 차기 국왕으로서의 입지를 회복하고, 카밀라와 재혼하는 데도 성공했다.[* 또한 블랜드는 [[찰스 왕세자]]의 큰아들 [[웨일스 공 윌리엄]]과 작은아들 [[서식스 공작 헨리 왕자]]의 사생활에 대한 민감한 언론 보도들을 관리하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카밀라는 '''1999년 런던 리츠 칼튼 호텔에서 열린 한 생일파티에서, 처음으로 찰스와 공식석상에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부터 카밀라는 왕세자의 공식적인 연인이 되었다. '리츠 작전'이라고 불리는 이 작업은 시기부터 장소, 의상, 심지어 표정까지 사전에 모두 철저하게 조율된 프로젝트였다. 2000년부터는 찰스의 공무에 동행하기 시작했으며, 2001년에는 국립 골다공증 협회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현재는 카밀라가 왕실 후원자(Royal Patron)가 되면서 왕립 골다공증 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회장으로 임명되기 이전부터 이미 회원으로 활동중이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모두 골다공증으로 사망해 해당 질병에 오래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 [[콘스탄티노스 2세]] 전 국왕의 60세 생일 파티에 찰스와 동반 참석해 [[엘리자베스 2세]]를 만나기도 했다. 이처럼 몇몇 민간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카밀라는 2002년 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50주년 [[골든 주빌리]] 행사에 초대되어 왕족들이 앉는 로열박스에서 함께 콘서트를 관람했다. 2003년부터는 아예 [[클래런스 하우스]]에서 찰스와 동거 생활을 시작했으며, 개인 보좌관까지 고용해 사실상 [[왕세자비]]와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렇다 보니 찰스와 카밀라의 재혼을 지지하는 여론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카밀라_약혼.jpg|width=100%]]}}} || || '''약혼반지를 끼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카밀라.''' || 2005년 2월 10일, 클래런스 하우스는 찰스와 카밀라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찰스가 카밀라에게 준 약혼반지는 할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엘리자베스 2세]]를 임신했을 때 [[조지 6세]]가 선물했던 반지라고 한다. 당시 [[잉글랜드 국교회]] 수장직을 계승해야하는 왕세자가 이혼녀와 재혼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당장 찰스의 큰할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도 이혼녀인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해야 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로완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모두 성명을 통해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다. 이후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약혼 발표 후 2개월 만에 결혼식이 열렸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gettyimages-115370222-1518303716.jpg|width=100%]]}}} || || '''2005년에 치러진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의 결혼식.'''[br]'''왼쪽부터 [[서식스 공작 헨리 왕자|{{{#000 해리}}}]], [[웨일스 공 윌리엄|{{{#000 윌리엄}}}]], [[찰스 3세|{{{#000 찰스}}}]], 카밀라, 로라, 톰''' || 세간의 비난과 각종 논란 속에서 2005년 4월 9일에 결국 찰스 왕세자와 정식으로 재혼했다. 본래 영국 [[성공회]]에서는 살아있는 전 배우자를 둔 자의 재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영국 왕족들은 이혼 후 재혼할 때 해당 교리가 없는 [[스코틀랜드]] [[장로회]]에서 식을 올려 왔다. 대표적으로 카밀라의 시누이인 [[프린세스 로열 앤]]이 1992년 [[티머시 로런스]]와 재혼할 당시 스코틀랜드 장로회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물론 찰스는 이미 다이애나가 사망했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았으나, 전남편인 앤드루가 생존해있는 카밀라가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찰스와 카밀라의 재혼을 전후로 '''성공회에서 해당 규정을 폐지하면서,''' 성공회 교회에서 인정한 결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원래는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려고 했지만, 여론이 좋지 않아 윈저 성 바로 앞에 있는 공회당에서 결혼식을 치렀다고 한다. 다만 결혼식이 끝난 후 진행된 [[감사성찬례]]는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진행했으며, 이 장면은 텔레비전으로도 [[https://youtu.be/IZr93-JjNYY|생중계]]되었다. 즉, 혼인 서약을 하는 장면만 공개되지 않았을 뿐 나머지 의식은 계획했던 대로 진행한 것이다. 직계 가족만 참석해 조촐하게 치뤘으며, 성직자가 아닌 동네 공무원이 주재하는 시민의례 의식으로 결혼식을 했다. 당시 여왕 부부도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왕세자의 배우자이므로 [[전하(호칭)|전하]](Her Royal Highness)의 경칭은 받았지만, 부정적인 여론 때문에 통상적으로 왕세자비가 사용하는 [[웨일스 공|웨일스 공비]](Princess of Wales) 칭호는 대외적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웨일스 공비라는 칭호가 [[다이애나 스펜서|다이애나]]를 대표적으로 의미하는 칭호여서 그런듯 하다. 대신 한단계 낮은 [[콘월 공작|콘월 공작부인]](Duchess of Cornwall)을 대외적인 칭호로 사용했으며, 스코틀랜드에서는 로스시 공작부인(Duchess of Rothesay)으로 불렸다. 재혼한 뒤에는 한동안 부적절한 처신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사치]] 문제. 명품 브랜드의 옷과 가방을 마구잡이로 구입하고, 한 번에 2만 5천 달러의 수당을 받는 헤어 디자이너를 고용한 것이 알려져 안 그래도 욕을 먹던 차에 몇 배로 더 욕을 먹었다. 대인지뢰 제거운동 등 활발한 사회 운동을 벌이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 [[영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다이애나 스펜서]]와 대조되며 더더욱 비난받았다. 2005년에 재혼하고 쭉 잘 사는 듯했지만 2015년부터 카밀라와 찰스 왕세자의 불화설이 간간이 돌았다. 다만 저 불화설이 사실이라 해도 "이제 와서 둘이 이혼할 리는 없다"는 견해가 정설이다. 다이애나와의 결혼 전부터 해온 불륜을 오랫동안 이어오며 결국 결혼까지 강행했는데 [[황혼이혼]]을 하면 둘 다 비웃음을 사고 망신살만 뻗칠 수밖에 없기 때문. 하지만 여러 논란은 2005년 4월 9일부터 2022년 9월 8일까지 17년간 카밀라가 왕세자비로서 여러 활동을 통해 모범적인 공무를 수행하고, 소탈한 성격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특히 [[다이애나 스펜서]]가 1997년에 사망한 후 20년 넘는 세월이 흐르며 찰스와 카밀라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어느정도 누그러진 점도 영향을 미쳤다. 젊은층은 다이애나가 사망했을 때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 나이였던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중장년층은 카밀라가 왕세자비로 활동하는 모습을 이미 십년넘게 지켜본 이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